바리톤 윤기훈. 오페라의 제왕 플라시도 도밍고의 발탁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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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뮤직에임 작성일15-07-15 18:04 조회21,2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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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페라의 제왕’ 플라시도 도밍고가 철썩 같이 믿는 사나이가 있다. 여차하면 자기를 대신해서 무대에 세워야 할 ‘주역 커버’를 세 작품 연달아 맡긴 가수. 한국인 바리톤 윤기훈이다.
도밍고의 커버를 맡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조금 설명하자면, 오페라 공연을 앞두고 도밍고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사고가 났다든지 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곧바로 무대에 올라 도밍고의 역을 완벽하게 대신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도밍고만큼 잘하지는 못한다 해도, ‘도밍고 하나 보려고 티켓을 사서 온 수천명의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잘하는 가수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커버가 중요한 것은 오페라 세계에서 이런 비상사태가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스타 탄생이 이루어지는 일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도밍고는 LA 오페라의 2014~15시즌에 ‘타이스’의 아타나엘 역과 ‘라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을, 오는 9월에는 2015~16시즌 개막작인 ‘지아니 스키키’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는데 이 3개작의 커버를 모두 윤기훈에게 맡겼다. 도밍고는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내려간 ‘하이 바리톤’이고 윤기훈은 거의 베이스에 가까운 ‘로우 바리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며 그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총애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도밍고가 34세의 ‘늦깎이’ 윤기훈을 발굴한 스토리다. 마치 ‘길거리 캐스팅’을 방불케 하는, 듣기만 해도 꿈같은 ‘이 남자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소개한다.
윤기훈은 24세에 성악을 시작했다. 보통 성악가들이 중학교 때 시작하는 데 비하면 10년쯤 늦은 셈이다. 실업계 공고를 졸업한 그는 성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아서 일찍 군대에 다녀온 후 잡다한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막연히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울대 성악과 다니던 교회 선배로부터 성악을 한 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처음엔 너무 생뚱맞다고 생각했어요. 성가대는 죽 했고 노래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성악은 꿈도 꾼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자꾸 주위에서 해보라고 부추기니까 점점 생각이 바뀌면서 ‘한번 도전해 볼까’ 이렇게 된 겁니다”
그때가 대입시 3개월 전, 기왕 하는 거 잘해야겠다 싶어서 석달동안 ‘빡세게’ 준비했다는 그는 한양대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고성현 교수를 사사하면서 수석으로 졸업했고, 한양음대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3학년부터 국내 콩쿠르에 도전하기 시작, 4학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세일 가곡콩쿠르 1위, 중앙콩쿠르 1위, 동아콩쿠르 1위를 차지하며 이름 석 자를 알리게 된다.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유학이었다.
“가고는 싶었지만 그때가 벌써 32세였어요. 남들보다 많이 늦었고, 공부도 국내에서만 해서 외국 경험이 없는데다 재정부담이 커서 유학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약혼녀가 비행기 티켓을 끊어온 거예요. 무조건 떠나라구요. 그렇게 등 떠밀려서 나왔습니다.”
2013년 2월. 일단은 독일로 갔다. 유럽이 학비가 가장 저렴하고 물가도 싸기 때문이었다. 베를린에서 몇 달 준비한 후 하노버 대학에 합격, 9월부터 공부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입학을 앞두고 8월에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리는 도밍고 성악 콩쿠르 ‘오페랄리아’에 경험삼아 출전했다. 수백명 지원자 중 40명을 추리는 1차 DVD 심사에 합격, 베로나로 달려갔으나 첫 예선에서 떨어지고 만다.
“도밍고 콩쿠르는 1차 심사에만 붙으면 여행경비를 전액 지원해 줍니다. 첫 라운드에서 떨어졌지만 어차피 베로나까지 왔으니 구경도 하고 오페라도 보고 밥이나 먹자하고 돌아다니는데 길거리에서 도밍고를 만났어요. 인사를 했더니 저에게 ‘꼭 할 얘기가 있으니 한 번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콩쿠르 끝나는 날 만나러 갔죠. 그리곤 제 인생이 바뀐 겁니다.”
도밍고는 1차 예선 때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으나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직 경쟁력이 없는 윤기훈을 눈여겨 본 모양이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너 노래하는 거 잘 들었는데 그렇게 노래하면 안 돼, 지금 선생이 누구야” 하고 큰 관심을 보이면서 그의 상황을 자세히 묻더란다. “지금 독일 유학하러 왔고 아직 사사할 선생을 못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도대체 누가 너를 지도해 주고 케어해 주겠냐”며 안타까워하더니 갑자기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내가 운영하는 ‘도밍고 영아티스트 프로그램’이 LA, 워싱턴 DC, 바르셀로나 세 군데 오페라에 있는데 그 중에서 어디로 가고 싶은지 고르라”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아무래도 한인들 많은 곳이 좋겠어서 LA로 가겠다고 했고 “그럼 바로 와”하는 소리에 독일 유학 계획을 다 접고 그냥 미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재작년 10월에 왔습니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이 9월 시작되는데 특채로 중간에 들어온 거죠. 저 도밍고 낙하산이에요, 하하. 미국에 올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도 없는데, 지금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를 등 떠밀어 내보냈던 약혼녀 최현정과는 지난달 결혼했다. 피아니스트인 그녀는 윤기훈을 따라 독일 유학을 준비하다가 행로를 바꿔 지난해 USC 음대에 입학, 석사과정 중이다.
LA 오페라의 도밍고-콜번-스타인 영아티스트 프로그램(Domingo-Colburn-Stein Young Artist Program)에 들어온 이후 윤기훈의 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 좋아졌고, 몇 달만에 도밍고의 커버를 맡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또한 이 프로그램의 수혜기간이 맥시멈 1~2년인데 한국인으론 처음 3년 계약을 맺었다니 내년 여름까진 이곳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아티스트 프로그램은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꿈과 같은 프로그램입니다. 도밍고에게 직접 레슨 받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보컬 코치들도 많이 초빙하고 투자를 많이 하지요. 월급도 적지 않게 나오기 때문에 노래에만 전념할 수 있습니다. 후진 양성의 열정이 뜨거운 도밍고 덕분이지요.”
여기서 일취월장한 윤기훈은 지난해 11월 일본 시츠오카 국제 콩쿠르에서 2위, 바로 이어서 열린 스페인 빌바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 및 인기상을 수상했다.
2014년에만 ‘타이스’에서 도밍고 커버와 시종 역, 아스펜 음악제에서 ‘카르멘’의 에스카미요 역, LA 필하모닉의 베토벤 코랄팬터지(구스타보 두다멜 지휘)에서 솔로이스트로 미국의 유수 무대에 데뷔한 윤기훈은 2015년에는 LA 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진은숙)에서 오리 등 3개 역을 맡았고, 바로 얼마 전 LA 오페라가 소규모로 공연한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피가로 역을 노래했다.
그는 올 여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지아니 스키키’에서 주역을 맡게 되며, 9월 LA 오페라의 ‘지아니 스키키’에서는 같은 역으로 도밍고를 커버하게 된다. 또 2016년에는 ‘나비부인’에서 샤플레스 역을, ‘라보엠’에서는 쇼나르 역을 노래할 예정.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어요. 큰 무대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고, 사람들이 내 노래를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이 그저 행복합니다. 무대에만 서면 저절로 힘이 나요. 몇 달 동안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과정이 하루 공연에 다 날아가 버리거든요. 오페라 체질인가 봅니다”
윤기훈의 노래는 다음 주 (4월23~26일)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4회 공연되는 ‘허큘리스와 뱀파이어’(Hercules vs. Vampire)에서 들을 수 있다. LA 오페라가 영화에 오페라를 접목한 이 공연에서 윤기훈은 주인공 헤라클레스의 대사를 노래한다.
티켓 24~46달러.
(213)972-8001 www.laopera.org
출처: 미주한국일보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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